인생을 살다 보면 누구나 좌절의 순간을 경험한다.
어린 시절, 좌절을 경험하는 것은 인간의 삶이 결코 만만하지 않음을 깨닫게 되는 첫 순간과도 같았다. 내 기억 속에 존재하는 그나마 가장 어린 시절 좌절의 모먼트를 회상해보고자 한다. 여담이지만 필자는 8세 이전의 기억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한다 해도 흐릿한 장면이나 단편적인 기분 정도이다. 혹시나 트라우마틱한 사건을 겪어서가 아닐까 혼자 열심히 탐정놀이를 해보았지만 시원한 답을 찾지는 못했다. 그저 행복하지 못했던, 사랑받지 못했던 좌절의 순간들을 스스로 지워버린 게 아닐까 추측해볼 뿐이다.
아홉살, 꿈 많은 어린 소녀가 있었다. 여기저기 심방 다니느라 바쁜 부모님을 따라다니며 혼자서 조용히 노는 방법을 터득한 소녀는 몽당연필 두 자루만 있어도 머릿속에 새로운 세계를 펼치며 신나게 역할놀이를 했다. 한참을 놀다 보면 어른들의 소리가 귓전에 맴돈다. " 어쩜 저렇게 혼자서도 말을 잘하는지, 쫑알이네요. 아나운서를 해야겠어요." 소녀의 부모님은 어깨가 으쓱해졌다. "착하다 우리 딸. 조용히 잘 있었네."
말하기를 좋아하고 말을 잘했던 아이는 학교에서도 곧잘 인정을 받았다. 선생님께 예쁨을 받고 똑똑하니 반장은 따놓은 자리라 생각했다. 반장 선거날이 다가왔다. 소녀는 잔뜩 기대를 하고 반장선거를 준비했다. 하지만 소녀의 엄마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소녀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반장되면 간식에 회비에 돈이 너무 많이 들어. 오늘 그냥 학교 가지 말자. "
소녀의 기억속에 깊이 남는 첫 좌절의 모먼트였다. 소녀는 착한 아이였다. 기나긴 어른들의 심방 시간을 장난감 하나 없이 조용히 이겨냈고, 아빠의 눈빛이 무서워 생떼 한 번 부리지 않았다. 부모님을 기쁘게 하려 열심히 책을 읽었고, 학교에서 늘 100점을 받았다. 소녀는 반장이 되면 부모님이 기뻐해 주시리라 생각했지만, 반장이 되는 것은 부모님께 기쁨이 아니었다.
학교에 가지 못한 반장 선거 날. 소녀는 조용히 엄마 곁에 누워 엄마의 지퍼 고리를 물었다. 이렇게라도 엄마 곁에서 사랑을 확인하고 싶었다. 아홉살 마음에 이해할 수 없는 좌절의 순간이었지만 그저 엄마가 소녀를 사랑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조용히 그렇게 엄마를 느끼다 보면 소녀의 마음이 채워질 거라 생각했다. 소녀의 엄마는 언제나처럼 잔뜩 찡그린 괴로운 얼굴로 기도를 드렸다. 엄마는 왜 매일 기도를 하면 눈물을 흘릴까. 도대체 엄마는 뭐가 그리 괴로운 걸까. 엄마의 슬픔을 잠재울 수 있다면 반장 따위 안 해도 괜찮았다. 소녀는 곁에 있지만 곁에 있지 않은 엄마의 곁에서 그렇게 스르르 잠이 들었다.
좌절의 모먼트가 지나고 다음날이 되었다. 이럴수가... 결석임에도 불구하고 반장이 되었다. 소녀의 마음에 처음으로 양가감정이 드러나기 시작한 순간 이리라. 기쁘지만 기쁘지 않은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잔뜩 찡그린 엄마의 얼굴이 더 일그러질까 소녀는 두려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집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들이 올라왔다.
인정. 학교에서 소녀는 존재 자체로 인정받고 있었다. 소녀가 그토록 갈구하던 공허한 눈빛의 엄마와 독기어린 눈빛의 아빠의 사랑은 언제나 텅 비어있었는데, 반장선거에 참석하지 않았음에도 50명이 넘는 친구들이 소녀를 인정해주었다.
전에 느껴보지 못한 꽉찬 기분이 소녀의 마음속에 알 수 없는 슬픔과 함께 차올랐다. 채울 수 없는 사랑을 이렇게라도 채울 수 있다면 이것이라도 더 노력해야겠다. 소녀의 마음속에 소녀의 삶을 괴롭힐 작은 다짐 하나가 생겨나는 순간이었다. 사랑을 받지 못한 좌절의 모먼트를 이겨내기 위해 사회적 욕구를 채워야겠다. 끊임없이 커져갈 인정을 향한 소녀의 갈구가 그렇게 시작되었다.
아홉살, 사랑을 갈구하던 작은 소녀는 그렇게 좌절된 사랑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존재만으로도 사랑받아 마땅한 아홉 살 그 어린 소녀는 사랑받으려면 노력해야 한다는 슬픔 다짐을 하며 구멍 난 마음을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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